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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이러니

orono 2019. 10. 31. 12:24

 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방 청소를 했다. 이왕이면 '대'청소를 하고 싶었으나 싱크대 타일과 화장실 변기의 묵은때를 힘껏 벗겨내고 나니 서늘한 가을 저녁에도 주르륵 흐르는 더운 땀방울이 선사한 싸늘함이 좋은 핑계가 돼 주었다. 그동안 온갖 마법의 문구들로 포장된 여러 세제들을 사용해봐도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주방 타일의 기름때와 변기의 묵은때가 스테인레스 철수세미로 무식하게 문지르자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참으로 기쁘면서도 황당한 순간이었다. 가끔은 안쓰러울 정도로 무식한 방법이 예상 외로 통할 때가 있다... 

 

 청소를 한 김에 오래 신지 않아 먼지만 수북이 쌓여있던 신발 두 켤레를 아름다운가게에 기증했다. 처음 하는 기증이라 그 절차가 꽤 복잡하리라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달리 너무도 간단하여 당황스러웠다. 돈을 받고 파는 중고시장처럼 까다롭게 검사하리라 생각하진 않았으나 최근 폐기해야 할 물품을 기증하는 얌체들이 많다는 기사를 본 터라 자못 긴장한 채로 가게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증천사'를 대하는 태도는 마치 물건을 팔러 온 손님인 양 무뚝뚝하여 약간 불쾌했다. 이렇게 유쾌하지 않은 상황을 겪게 되면 늘 저번에 읽었던 책(<무엇이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가>)의 내용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독이곤 한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삶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던 작가의 확신에 찬 말을 허세라고 비웃으며 코웃음치기 바빴는데... 매장 안에 손님이 꽤 많아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며 돈을 받고 일하는 직원에게 요구하는 서비스의 질을 자원봉사자에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상황'을 찬찬히 되짚어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읽게 된 책 한 권이 이렇게나 중대한 전환의 계기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복잡하다 걱정했던 일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벼운 우연이라 생각했던 책은 묵직한 흔적을 남기는 일상의 아이러니...

 

 무더운 여름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모기가 깊어가는 가을에 기승을 부린다. 오늘 새벽에는 모기 덕분에 뜻하지 않게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내 피를 빨아야만 했던 모기의 긴급한 상황과 사정까지 생각해 줄 정도로 너그럽지는 않아서 나는 무심하게 모기의 피를 아니 나의 피를 보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