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눈동자에 담기기 위해

전봇대들은 휘어진다.

-'개처럼' 부분

 

텅 빈 가게에 서 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옆모습이 정면을 향해 걷고 있다.

-'렌트' 부분

 

빈대는 나 대신 나를 물어 살고 빈대는 나를 물어 나 대신 내 몸을 발견한다.

-'옆구리를 긁다' 부분

 

창문을 씻어주던 어제의 빗물은 뚜렷한 얼룩을 오늘의 창문에 남긴다.

-'멍' 부분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걸으면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 돌' 부분

 

두고 갔다며

어떤 여자가 거울을 주워 주었다.

버린 것이었는데.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래의 일' 부분

 

 

 임솔아의 이 시집은 간결해서 좋다. 시인 내면의 풍경에 침잠하느라 복잡하고 무거워져 처음 보는 외국어로 적힌 글을 읽는 듯한 답답함을 주는 최근의 시집들과 달라 마음에 든다.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내면의 "끔찍한 다툼들"마저도 최소한의 "박자"를 갖춘 시로 정리해내는 능력과 매력이 최근의 시집들에서는 실종된 것 같아 아쉬울 때가 많다. 그리하여 소설책만큼 두꺼워진 시집이 때론 한 장의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에 인용한 '노래의 일'은 <나>와 <거울에 비친 나>의 끔찍한 간극("끔찍한 다툼들")이 주는 긴장에서 끝끝내 벗어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을 웬일인지 밝게 노래하고 있다. 내가 버리고 떠나려 하는 것을 다시 가져다주는 이를 마냥 저주할 수 없는 까닭은 어쩌면 '어떤 여자'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다툼과 간극을 섣불리 화해시키거나 좁히려 하지 않고 다만 차분하게 바라보고 기술하는 것이 바로 노래 아니 시의 일이라고 시인 스스로를 다독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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