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필독서로 꼽히는 유명한 책들을 읽으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고전에 대한 기대가 커서 실망한다기보다는 지적 호기심이 아닌 의무감으로 독서를 시작하면 만족하기 힘들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끝내 고전을 읽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주는 짧은 만족감은 늘 큰 허전함을 남기곤 한다...

 

 이번에 읽은 <모비딕> 역시 워낙 유명하여 오랫동안 내 의무감을 자극해왔던 책인데 영화 <마틸다>에서 똑똑한 소녀가 <모비딕>을 재밌게 읽는 장면이 나를 부끄럽게 하여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게 되었다. 선장 에이해브의 '모비딕'을 향한 집념 혹은 집착과 비극적인 결말은 분명 인상적이지만 지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피쿼드'호의 고래잡이 이야기는 특별한 사건 없이 장황한 서술과 묘사가 계속되어 무척이나 지루했다. 차라리 이슈메일이 피쿼드호에 오르기 전에 벌어진 소소한 사건들을 지켜보며 이슈메일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흥미로웠다. 더불어 <모비딕>을 읽게 된 거의 유일한 지적 호기심이었던 일등항해사 스타벅과 스타벅스의 연관성을 끝내 찾지 못한 점이 다소 아쉽다. (이 아쉬움은 마크 포사이스의 <걸어다니는 어원사전>을 읽으며 풀 수 있었다.)

 

 

 

 

 

p. 142. 사람은 무언가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도, 거기에 벌써 깊이 말려들어가 있으면 무의식 중에 자기 자신에게도 그 의심을 은폐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있다. 

 

p. 221. 왕관을 쓰고 있는 나에겐 멀리까지 미치는 그 섬광이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은 내가 이 눈부시게 현란한 왕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낀다. 

 

p. 405. 당신이 한쪽에 로크의 머리를 들면 그쪽으로 기울어지지만, 반대쪽에 칸트의 머리를 들면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평형을 유지해도 당신은 심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배의 균형을 잡는다. 오, 어리석은 자여! 그 머리들을 모두 바다에 집어던져라. 그러면 똑바로 가볍게 물 위에 뜰 수 있을 것이다. 

 

p. 479. 법조문이 너무 간결하면, 그것을 설명하는 한 권의 방대한 주해서가 필요하게 된다. 

 

pp. 544-545. 겁 많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평화로운 숲속에 누워 있는 앙상한 해골만 보고 이 놀라운 고래를 정확히 파악하려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부질없는 짓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오로지 절박한 위험 속에서만, 분노에 불탄 고래의 꼬리가 만들어내는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만, 끝없이 깊고 넓은 바다에서만 풍만하게 살찐 고래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발견할 수 있다. 

 

p. 546. 광범위하고 개방적인 주제의 장점은 이렇게 우리 자신까지도 확대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주제의 크기만큼 커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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