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열린책들에서 나온 체호프의 희곡선집 <벚꽃동산>과 소설선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었다. 두 책 모두 오종우 선생의 번역인데 신경 거슬리는 부분 없이 읽기 좋았다. 다만 두 권 모두 작품해설이 다소 실망스럽다. 표제작인 '벚꽃동산'과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워낙 큰 기대를 안고 읽었던 터라 큰 감흥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비극 배우'와 '대학생', '어느 관리의 죽음'과 '문학 교사'등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사실 거의 모든 작품이 훌륭해서 시간이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면 한 번 더 읽어보고싶은 작가다. 러시아 문학은 등장인물 이름에 익숙해지는 게 언제나 가장 힘들다... 아래는 모두 소설선집에서 인용한 글이다.
pp. 52-53.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나이가 들었다. 한때 좋아했고 즐거움과 희망을 가져다주었던 그 모든 것들, 빗소리, 천둥소리, 행복에 대한 생각들, 사랑에 관한 대화들, 이 모든 것들이 오직 기억으로만 남아, 나의 앞에는 단조롭고 황량한 먼 길만 보인다. 그 위에는 인기척도 없고, 저 멀리 지평선은 무섭도록 어둡다......
-<어느 여인의 이야기>
p. 76. 안드레이 에피미치는 지성과 정직을 대단히 사랑하지만, 자기 주위에 지적이고 정직한 현실을 만들어 내기에는 품성이나 자신감이 부족하다. 명령하고 금지하고 주장하는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6호 병동>
p. 146. 영원한 진리라...... 그런데 영원히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진리가 가능할까? 그리고 또 필요할까?
p. 157. 미치고 과대망상에 걸렸을 땐 즐겁고 활기차며 행복했었는데, 그때 난 흥미를 가졌고 독창적이었단 말이야. 지금은 신중하고 착실해졌는지 모르지만 남들과 다를 바 없어졌어.
-<검은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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