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책이라 이따금 등장하는 묵직한 내용과 어색한 번역, 오탈자 등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읽었다. 논쟁적인 글을 읽을 때마다 모든 비판은 필연적으로 대상을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과오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건지 고민하게 되지만(키에르케고르의 명언으로 알려진 "Once you label me you negate me.") 동시에 그 고민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방대한 참고도서 목록을 작성할 수 있어 기쁘다. 

 

 

 

p. 28. 이데올로기 전투에서는 "사상의 간접적인 중개자", 말하자면 공개 토론회와 대중의 정치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며 의견을 바꾸게 하는 언론인과 정치 고문, 평론가와 지식인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p. 35. 모든 행동은 궁극적으로는 이기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기심을 폭넓게 해석할수록 그 유의미성은 줄어든다.

 

 

 

pp. 157-160. 공공선택이론 내에서도 어리석은 유권자라는 가정은 부분적이고 자기모순적으로 적용된다. 유권자가 공공지출 공약에 끊임없이 속는다면, 유권자에게 지출 삭감과 긴축 재정을 우선시하는 정부를 지지해달라고 간청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러나 많은 공공선택이론가들이 그런 주장을 거듭해왔다. (...) 선거에서 경쟁이 치열해지며 이기적인 정치인들이 공공지출 공약을 남발한다면, 그 악순환을 끊겠다고 공약하는 정부가 당선될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따라서 공공지출의 감소를 대외적으로 내새웠던 레이건과 대처의 당선은, 공공선택이론이 가정하듯이 유권자와 정치인이 항상 어리석고 이기적이지는 않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여기에서 모순을 피하기 어렵다. (...) 물론 다른 모순도 있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기 때문에 정치인과 관료와 유권자도 이기적이라고 가정한다면 공공선택이론가를 비롯해 학자들도 이기적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공공선택이론을 충실히 따르자면, 우리는 공공선택이론가를 객관적인 학자나 중립적인 관찰자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도 자신의 경력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말하고 글을 쓴다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 잠깐만! 공공선택이론이 자신의 이론으로 너무 쉽게 반박되는 것 같지 않은가? 공공선택이론으로 공공선택이론을 비판하는 이런 접근법은 지나치게 성급하고 자기기준적인 학계의 관습이다. 정치에 대한 공공선택이론의 관점에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동기를 얻는 정치인과 관료, 투표자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생각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500년 전, 이탈리아 외교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정치인과 관료가 취하는 정교한 전략에 대해 자세히 서술했다. 공공선택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순진하고 단순한 환상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어떤 바람직한 정책 변화가 경제학자나 그 밖의 전문가에게 환영받으면 정치인과 관료가 그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란 환상이 있었다. 뷰캐넌과 그의 동료들은 그런 환상을 깨뜨리는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다. 하지만 1980년대에 그들은 이미 인사이더, 즉 내부자였다. 

 

 

 

p.171. 정치인은 선거 때문에 이자율을 조작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신뢰받지 못하므로, 선거와 무관한 테크노크라트에게 정치 권력의 대부분을 양도해야 한다고 정치인 자신이 믿게 되면, 유권자도 똑같은 식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정치인들은 비선출직 관리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행위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선거로 위임받은 권한을 포기하는 것이라 예부터 생각해왔다. 정치인과 세계은행 같은 조직이 권한 위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해 상대적으로 비관적인 그들의 견해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얄궂게도 더 나은 정부를 만들려는 내부자들의 진실한 욕망에 의해 탈정치화가 가속화되는 듯한 현상은, 그들이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다. 

 

 

 

p. 207. 내 기여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라는 믿음은 무임승차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를 바꾸겠다는 개인의 행동은 무의미하다는 운명론적 세계관까지 부추긴다. 권력자들이 이런 현상을 타파하려는 사람들의 의욕을 꺾어놓으려 하며, 개인은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믿음까지 확산시키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pp. 256-257. 특정한 시대와 지역에서 특정한 시장의 범위를 제한하는 걸 정당화하기 위해 영원불변한 보편적인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기도 하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시장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 베커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구입하며 행복을 생각할 때마다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행복을 극대화하는 과정에 제한을 두며, 어떤 것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다. 어떤 철학도 보편적이지 않고, 보편적일 수도 없다는 뜻이다. 

 

 

 

pp. 289-290. 그들은 인센티브에는 자발적인 교환이 전제되므로 인센티브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여지는 없다고 주장한다. 누구도 자신의 뜻에 반해 일하라고 강요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인센티브의 타당성을 역설하는 논증과 모순된다. 우선, 인센티브에는 그나마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이유에서 규제나 강압 같은 다른 형태의 사회 통제보다는 인센티브가 권고된다. 한편으로 인센티브의 성공 여부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인센티브에 대해 예측한 대로 반응하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인센티브의 논증에는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면서도 통제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전제되어 있다. 

 

 

 

p. 299. 카너먼과 트버스키는 우리가 호모 에코노미쿠스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이 입증하며 혁명을 일으켰지만, 우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정통 경제학의 핵심적인 전제에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합리적인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전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p. 308. 경제학자들은 도덕적 문제와 관련된 판도라의 상자를 열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정성과 책임, 자율성과 존경 같은 도덕적 가치는 고려 대상에서 배제된다.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두려는 경제학자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 상자를 영원히 닫아둘 수는 없다. 이런 도덕적 가치들은 인센티브가 효과를 발휘하는지, 그 부작용이 유해하지는 않은지를 판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셋째, 경제학자들은 모든 인센티브를 거래나 교환으로 보았다. 인센티브를 받는 대신에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또 그 교환은 자발적이기 때문에 한쪽이 더 궁색해지면 교환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센티브 제도는 양쪽 누구의 행복도 해치지 않는다. 일부 경제학자는 이런 결론을 더 밀고 나가, 인센티브는 비윤리적일 수 없다고도 주장한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인센티브에 대한 더 이상의 윤리적 평가를 차단하려는 안간힘에 불과하다.

 

pp. 309-310. 인간은 무척 복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인센티브와 넛지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예측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유도할 때 제기되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이해하려는 경제학자들의 노력은 이제야 인간의 복잡성을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을 뗀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율성을 정체성의 근간으로 생각하며 지키려고 결심한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율성을 방해하는 인센티브에 저항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어떤 가부장적 권위체가 우리를 돌보고 우리를 대신해 결정하기를 바란다. 자율성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소중할 때는 자율성을 발휘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의사결정을 포기한다. 이렇게 우리는 간혹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 그러나 그런 모순을 항상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율성을 원하면서도 현명하고 자애로운 권위자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보장해주기를 바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런 모순을 열린 자세로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이다. 

 

 

 

p. 344. 낡은 정통 이론을 뒤엎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때 우리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질적인 거부감과, 불확실성을 계량화하겠다는 집요한 고집이다. 

 

 

 

pp. 399-400.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들의 칭얼대는 불만을 조롱하고 비웃지만, 그런 불만의 뒤에 감추어진 근본적인 이념에는 대부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동의한다. "소득세는 땀 흘려 일한 사람이 적법하게 얻은 소득에서 떼어가는 일종의 도적질이다. 따라서 세금은 좋게 보아도 필요악이므로 가능하면 최소화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 이런 현상은 단순히 포퓰리즘으로 폄하할 것이 아니다. 조세 경제학자, 회계사와 변호사는 '조세 부담'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당신이 '조세 부담'을 중립적 표현이라 생각한다면,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공 지출'을 '공공의 이익'으로 대체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전 소득이 당신의 소유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먼저, 과세 전에는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과세로부터 자유로운 소유권은 없다. 소유권은 법적 권리이다. 경찰과 법원 등 다양한 제도적 기관들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법이 필요하다. 이런 기관들은 세금을 통해 재정을 지원받는다. 세금과 소유권은 실질적으로 동시에 생겨났다. 현대 사회에서는 둘 중 하나만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가 세금과 재산권의 내재적인 상호의존성을 간혹 간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개별적인 존재로서는 누구나 그 상호의존성을 벗어나는 환상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은 세전 소득을 모두 차지하고, 그 소득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세금을 충실히 납부하며 그런 권리들을 집행하는 시스템을 유지한다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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