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라는 제목이 기대하게 만드는 섬세한 관찰과 사색의 흔적은 마지막 장인 '산책'을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이 책이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처음 몇 장을 읽어내려갈 때는 기대와는 다른 전개에 다소 당황스러웠으나 작가가 펼치는 이야기보따리가 제법 흥미롭고 신선하기 때문에 읽기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옮긴이의 말'은 번역 후기나 해설의 차원을 넘어선 창작에 가까운 부분이 많아 다소 과한 느낌이 든다. 발저에 관한 '미미한 정보들'을 전달하는 정도로 담백하게 구성됐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36쪽. 책을 읽을 때 나는 무척 점잔을 빼면서 한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고개를 들어 나를 주시하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 정신과 재치를 발전시키고 있는 저 사람은 얼마나 똑똑한 인간인가, 그런 그들의 감탄을 의식하면서 페이지 하나하나를 장엄하고 엄숙한 동작으로 잘라서 펼치고, 그렇게 독서에 푹 파묻힌 인간의 자세를 취했다는 사실에 충분히 만족하고 나면, 더 이상은 읽지 않는다. (...) 나는 허영심이 강하지만 기묘하게도 값싼 만족으로 채워진 허영심이다. 

 

158쪽. 생각이 많으면, 사랑을 잃는다. 

 

163쪽. 나는 그가 외모에서 자신의 직업과 관련한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는 점이 참 멋있고 괜찮다고 느꼈다.

 

289-290쪽. 아무리 성실한 남자라고 해도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곤경을 겪지 않는 자가 그 누가 있겠으며 한 인간이 가진 희망, 계획, 꿈, 그 모두가 세월이 흘러도 전혀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우가 그 얼마나 있겠습니까? 머나먼 동경과 대담한 소망, 달콤한 행운에 대한 크나큰 기대가 조금의 타협이나 삭감도 없이 처음 그대로 온전히 충족된, 그런 영혼이 과연 어디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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