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흥미로운 책이다. 만약 같은 주제를 놓고 미국이 아닌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해 논한 책이 발표됐다면 나는 아마도 이렇게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책을 쓴 사람의 이념적 성향이 무엇인지 더 정확히는 어느 당을 지지하는지 혹은 지지할 것 같은지 머리를 굴리며 읽기도 전에 그 책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부족적'인 습관을 이겨내지 못했을 테니까.

"The idea has become common, on both right and left, that when people put forward an argument you cannot separate what they say from who they are." (2018년 연재된 <The Economist>의 Philosophy Briefs 시리즈 서문에서 발췌)

 

 

 

 

프롤로그에서 인용한 아래 구절들만 읽어도 이 책에 대한 흥미가 생길 것이다.

 

pp.11-12.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평범한 미국인 상당수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 정체성을 놀라울 정도로 무시하거나 간과한다. 자신이 돕고자 한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예를 들면, '점령하라 Occupy Wall Street' 운동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운동이었지만 사실상 가난한 사람을 포함하지 않은 운동이었다. 주동자도 참여자도 상대적으로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노동자 계급 미국인은 '점령하라' 운동에 참여만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많은 이가 '점령하라' 운동에 매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농촌 지역의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저항 운동이라는 건 거의 대부분 엘리트 계층의 지위 상징 status symbol 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집회에 나간 사진을 노상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다. 자신이 저항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친구들이 다 알도록 말이다. 엘리트 계층이 가난한 우리를 대신해 저항에 나서준다고 할 때, 우리가 보기에는 도움이 안 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또 하나의 '밈 meme'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도 자존심이 있고, 그들의 자아 고결성을 입증하는 데 소품으로 쓰이고 싶지 않다."

 

pp.12-14. '점령하라' 운동을 실제로 미국의 저소득층과 하층 계급에서 광범위하게 호응을 얻고 있는 운동들과 비교하면 엄청난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번영 복음 prosperity gospel 은 히스패닉인 제 가족이 명백하게 자신의 이익에 배치되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나 반오바마적, 친트럼프적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 메커니즘입니다." 

미국 엘리트 계층이 놓치고 있는 부족적 정체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는 강력한 '반기득권 정체성'이다. 트럼프 당선에 크게 일조한 것도 바로 이 반기득권 정체성이었다. (...) 지금도 트럼프 당선의 배경이 된 부족적 정치를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 어떻게 저소득층 미국인들이 트럼프가 자신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었을까? 미국 엘리트들이 놓친 점은 트럼프가 취향, 감수성, 가치관의 면에서 실은 백인 노동자 계급과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부족 본능은 '동일시'가 시작이자 끝인데, 트럼프 지지자들은 본능적인 감정의 수준에서 자신을 트럼프와 동일시했다. 그들은 말하는 방식(라커룸 토크), 옷차림, 직설적인 반응, 계속 들통나는 실수, 진보 매체로부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충분히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독서량이 많지 않다고 계속해서 공격받는 것 등 트럼프의 모든 것에 대해 동일시할 수 있었다. 백인 노동자 계급은 트럼프의 적이 곧 자신의 적이라고 느꼈다. 또한 트럼프의 막대한 재산도 동일시의 요인이었다. 그것이(아름다운 아내와 자기 이름이 박힌 거대한 빌딩들도 함께) 바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자 계급 미국인에게, 기득권에 반대하는 것과 부자에게 반대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pp.14-15. 부족 정치는 집단을 드러내는 표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엘리트 계층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서 차이를 드러내 주는 표식은 늘 미학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엘리트, 특히 진보 쪽 엘리트는 자신이 얼마나 다른 이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리려 하는지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조잡하고 싸구려 같은 것을 질색한다. 그런데 그 조잡하고 싸구려 같은 것들은 대개 저소득층과 관련이 있고, 이는 우연이 아니다. 

 많은 엘리트 계층이 보기에 '애국심'도 그런 조잡한 취향이다. 적어도 'USA'를 연호하고 버드와이저를 마시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고 외치는 데서 드러나는 애국심이 그렇다. 미국 엘리트 계층은 자신이 '부족적'인 것과는 정반대라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이 보편 인류를 찬양하고 전 지구적, 코즈모폴리턴적 가치를 받아들인 '세계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그 코즈모폴리턴주의가 얼마나 부족적인 것인지를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학력이고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코즈모폴리턴주의는 사실 매우 배타적인 부족적 표식이다. 

 

pp.15-16. 엘리트 계층이 촌스럽고 평범하고 '애국적'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멸보다 더 부족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미국 엘리트 계층은 종종 미국의 빈민보다 세계의 빈민에 더 공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이 세계의 빈곤에 막대하게 일조한 부분들은 어느 것도 없애려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세계의 빈민이 더 낭만화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평범한 미국인들은 또 그들대로, 엘리트 계층을 '진짜 미국인'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는 채로 저 멀리서 권력의 지렛대를 통제하는 소수 집단이라고 생각해서 몹시 혐오한다. 어느 면에서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대다수의 미국인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그것을 멸시했기 때문에 2016년 대선에서 판도를 완전히 잘못 파악했다. 

 

pp.16-17. 미국인은 민주주의를 '통합을 불러오는 요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가령 인종, 민족, 분파 간 분열을 따라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민주주의가 집단 간 분쟁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 '자유'가 사람들의 가장 깊은 열망에 호소력이 있을 것이라는 근본적인 희망 (...)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가진 열망은 그것 말고도 많다. 

 근현대의 위대한 계몽주의적 원칙들(자유주의, 세속주의, 합리성, 평등, 자유 시장 등)은 인간이 열망하는, 그리고 늘 열망해 온 종류의 집단 정체성, 즉 부족적 정체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계몽주의적 원칙들은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를 강화했고, 전례 없는 기회와 번영을 창출했으며, 인간의 의식과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지만, 이 원칙들은 개인이자 보편 인류의 일원인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인 반면 부족 본능은 개인과 보편 인류 사이의 중간 영역을 차지한다. (...) 특히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 그저 생존만을 위해서도 고투해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이상주의적인 원칙들이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기 일쑤다. 그리고 어느 경우든 그런 원칙들은 더 원초적인 집단적 열정과 경쟁하기에는 호소력이 크게 떨어진다. 막대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은 보편적 형제애라는 개념과 부합하기 어렵다. 

 

p. 19. 좌파의 많은 사람이 '포용적인' 보편주의적 화법(가령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의 화법)에 등을 돌리게 됐다. 그런 보편주의적 화법이 실제 역사에서 주변화되어 온 소수자들의 억압과 그들의 경험이 가진 특수성을 지워 버리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느 면에서 이 새로운 배타주의는 인식론적인 주장이기도 하다. 외집단 사람은 내집단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신은 백인이니까 X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은 여성이 아니니까 Y를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은 퀴어가 아니니까 Z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문화적 적절성' 개념은 '이것들은 우리 집단의 상징, 전통, 유산이니 외집단 사람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pp. 20-21. "대학생인 딸이 계속해서 백인 특권이라느니 인종적 정체성이라느니 인종별로 기숙사를 다르게 해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오는 거예요. (...) 나는 정체성 정치가 싫어요. 하지만 모든 게 정체성 정치가 되어 버린 마당이라면, 화요일에 수백만 명의 백인이 '백인으로서' 투표했다고 해서 좌파가 그리 놀랄 일이었을까요? 당신이 정체성 정치를 원한다면 당신도 결국 정체성 정치에 맞닥뜨리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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